구형왕의 양국-일본천도-귀국 후 연명체 결성
일본 제2가락국의 가야부흥운동 지원 등 확인
일곱번째 이야기 ‘구형왕의 생애’ <2>
# 구형왕은 532년 나라를 신라와 합병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2년 뒤 다시 돌아와 서부 가야 지역의 10소국 연맹주로서 경남 산청에서 가야부흥을 주도하였다.
# 셋째 아들 무득은 일본 대화국의 흠명왕으로서 562년 가야멸망 시기까지 부왕인 구형왕을 지원하여 가야부흥에 적극적으로 힘을 썼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위의 내용은 동아시아 고대사 연구소 임춘택님이 ‘산청 화계리 석총대릉 연구(2007)’를 하여 정리한 내용으로 그 역사의 흔적들이 유적지로 형성되어 있는 곳은 현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 검(금)석골로 주장하는 내용이다.
신라장수 사다함과 이사부를 맞아 구형왕이 마지막으로 저항하였던 곳으로 전해오는 이 지역은 삼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입구는 경호강이 휘둘러 흐르고 있어 현재에도 요새로
보인다. 주변의 모든 마을들에서는 아직까지 구형왕과 관련된 전설과 설화 지명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수년을 두고 가락 산청군종친회에서 탐색조사를 하였던 적이 있다.
이렇게 가야의 멸망시기 산청과 서부경남 일대는 그 당시 전쟁 역사가 쓰여지는 영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도적으로 전쟁사를 이끌었던 인물이 구형왕으로 가야 부활을 위하여 저항을 하였던 것으로 본다. 그 시대적 배경으로 산청의 검(급)석골을 들 수 있고, 그곳의 구형왕 전설과 지명을 토대로 유추하면 후대 사가들의 구형왕 검석골전투의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추정하여 본다.
삼국사기 사다함조를 살펴보면, “사다함의 기병 5천이 먼저 달려 매단문(梅檀門)으로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니 성안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쳤다. 이사부가 이끄는 군사의 보병은 이사부 기병의 몇 배는 되었으리라고 보는데, 신라 군사를 죄다 동원한 큰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매단문 梅檀門)을 후대 학자들이 전단문(栴檀門)으로 고령에 있는 것으로 보고, 고령이 대가야의 종주국으로 보았으나 사실 고령에는 이런 지명이 없을 뿐더러 삼국사기 영인본에
는 분명히 전(梅)단문이 아니라 매(梅)단문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위의 내용으로 ‘매단’은 산청군 금서면 매촌리로 보고 있으며 매촌리에는 현재 구형왕과 관련된 여러 지명들이 있다. 매단문(매촌리)을 지나 금석궁(금석골)에 이르는 곳에는 대장(大壯)마을, 큰보자기 할망바구, 전설과 함께 전해지는 지명들과 구전설화들은 일본서기에서는 ‘큰보자기 할망’으로 그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산청 문화총람)
글쓴이 김태훈 가락국양왕덕양전 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