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근칼럼 東松餘談] 천왕봉 성모석상
[하동근칼럼 東松餘談] 천왕봉 성모석상
  • 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승인 2021.12.0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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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전 imbc 사장
하동근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교수 / 전 imbc 사장

해마다 연말, 이맘때쯤 되면 생각나는 것이 지리산 천왕봉에 자리 잡았던 성모석상이다. 과거 조선시대 힘없고 돈 없는 하층민들이 몸에 깃든 고질병을 고치려고 천왕봉의 성모석상을 찾아 엄동설한의 흉악한 한겨울 날씨에도 남녀노소가 움막을 짓고 그 속에 뒤엉켜 치성을 올리고 치병을 소원했는데, 이 같은 행위를 풍기문란이라 힐난하고 무식한 소행이라 비난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토록 했다는 당시 양반과 승려의 행위를 적은 기록을 읽고, 양반지배의 조선이라는 나라에 살았던 피지배층의 피곤했던 삶과 성모석상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 전통 민속종교의 상징이 갖는 퇴색한 의미가 아릿한 아픔으로 다가 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의원은 고사하고 첩약 한 재조차 지어먹을 수 없었던 비참하고 힘든 삶을 영위하던 당시 하층민들이 난치병에 걸려 어디에도 하소연하거나 병의 차도를 강구해 볼 수단조차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해졌을 때,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천왕봉을 올라 성모석상을 찾아 오로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기도를 했다. 그것이 지리산 민속 신앙의 바탕이었다.

그들의 신앙이었고 마음의 위안처였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성모석상은 그들의 삶처럼이나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수난을 받았다. 성모석상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고려 말 때 천왕봉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벌였던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한 아지발도 등 왜구의 잔당들이 패퇴하는 과정에서 천왕봉을 올라 성모석상을 두 동강이 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신라시대부터 아니면 최근 고려 말부터는 성모석상은 천왕봉을 지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산 성모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라는 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는 설, 그리고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 팔도 무당의 시조라는 설 등 분분하다. 성모석상은 이후 조선시대와 근대사에서 종교적 이유로 두 차례나 천왕봉에서 발아래 산속으로 굴러떨어지거나 보쌈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외래 종교의 진출에 따른 민속 전통 신앙의 추락과도 괘를 같이 했다고나 할까?

천년 이상 지리산의 역사와 애증을 고스란히 녹아있는 성모석상은 현재 산청 시천면 중산리에 있는 천왕사라는 절에 모셔져 있다. 왼쪽어깨에서 비스듬히 잘려나간 칼자국과와 깨진 콧날, 그리고 목 부분의 잘린 자국이 여전히 선명히 눈에 보인다. 성모석상의 천왕봉 원상복귀 문제는 그동안 이런저런 곡절이 많았다. 재판까지 가는 경위도 있었지만 현재 성모석상은 커다란 암반 좌대와 몸통을 시멘트로 완전히 봉합시켜 이제는 아무도 함부로 훼손하거나 분리시킬 수 없도록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있다. 천왕봉으로 다시 보내자는 요구에 또 석상을 다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천왕사 측의 주장이다.

그런 사연 탓인지 지리산 주변과 골짜기에는 성모석상이 여럿이 자리를 하고 있다. 백무동 입구에도 있고 중산리 계곡 건너편에도 성모상이 또 있다. 최근에는 천왕봉 오르는 길, 로터리 대피소 위에 있는 법계사에도 성모상이 새로이 자리를 잡았다. 함양에서 넘어가는 오도재 정상에도 성모석상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본래 성모석상이 보여주는 은은한 눈가의 미소가 자리잡은 내 어머니 같은 내 할머니 같은 인자한 얼굴은 보여주질 못하고 있다. 지리산에 겨울이 다시 오고 있다. 이미 해발 천 미터 이상의 고지에는 상고대가 몇 차례 형성되었고 천왕봉 꼭대기에는 눈이 수십 센티 이상 쌓여 하얀 눈을 뒤집어쓴 정상의 표지석을 북풍한설 찬바람이 호되게 때리며 지나가고 있다. 지리산을 오른 지인이 보내주는 백설분분한 천왕봉 주변 풍경을 보면서 70년대까지도 천왕봉 터줏대감으로 자리했던 성모석상의 잔상을 그려보면서 새해를 맞이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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