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1.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진주(晉州)(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11.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진주(晉州)(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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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1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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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진주역사의 시대별 인문학적 고찰

남명사상 영향 조선 최고 애국충절 도시로 탈바꿈

두 차례 왜란으로 번창했던 진주지역의 모습은 사라졌어도
남명 경의사상이 진주정신으로 승화 인권·저항정신 형성
남명, 형이상학적 학문 멀리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

의병투쟁 진주농민항쟁 진주3.1운동 형평운동으로 이어져
단성소 등 너무 직설적이고 과격한 언행으로 논란빚기도
반대 측 ‘임금에게 불손’ ‘(儒者의 기상 없다’ 공격하기도
남명 조식 초상화.
남명 조식 초상화.

1500년대 말 진주는 두 차례의 갑작스런 왜적의 침탈(侵奪)로 진주의 산하(山河)는 처참(悽慘)하게 초토(焦土)화되고 수많은 진주사람이 잔혹(殘酷)하게 살육(殺戮)됨에 따라, 전대의 정말 아름답고 쾌적한 삶터로서의 모습들은 모두 사라져 진주 부활의 기미(氣味)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진주는 지리산, 덕유산 그리고 가야산, 세 명산(名山)의 천신혈맥(天神血脈)의 도움과 지역의 선대성현(先代聖賢)들 중심의 영남학맥(嶺南學脈)의 거두인 남명의 실천유학(實踐儒學)의 경의(敬義)사상의 영향으로 후일 진주정신(晉州精神 : 主體, 人權, 好義)의 형성에 이어, 한말(韓末)의 의병투쟁과 진주농민항쟁, 진주3.1운동 그리고 형평운동(衡平運動)까지 이어지는 명실공히 진주를 저항(抵抗)과 인권정신(人權精神)의 중심도시로써, 말 그대로 조선팔도 최고 애국충절(愛國忠節)의 수준 높은 도시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본 호에서는 진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에 지역적, 교육적 연고로 살았던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이 진주와 진주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조선 왕조에 있어서 임진왜란을 전후한 선조 임금의 시기는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고, 또한 이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정파(政派) 사이에 당쟁이 발생하고 전개하는 시기로 특징을 드러낸다.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를 지역적 연고로 삼아서 남명 조식에 학문적 연원을 두고 있는 일련의 많은 유학자 집단을 오늘날 남명학파로 부르고 있다.

小白山高勢自雄, 多雲多雨又多風.

소백산 높이 솟아 형세 절로 웅장하니, 구름 많고 비 많고 바람도 많네.

南州六十淸靈氣, 竝與天王薄太空.

남쪽 예순 고을의 맑고 신령한 기운, 모두 천왕봉과 함께 하늘에 닿았네.

小白居人高小白, 天王遊子大天王.

소백산에 거하시는 분 소백산 보다 높고, 천왕봉에 노니시는 분 천왕봉 보다 더 크네

一言亦有中間蔽, 直把輿圖仔細量.

한 마디 말이 그 사이를 가렸으나, 곧 바로 지도 보면 신중히 생각할 일이다.

상기 시는 조선 중기의 진주출신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이 지은 <天王峯詩>라는 작품으로, 퇴계와 그 문인들의 학문을 접하고는 이를 남명과 비교하여 느낀 소회를 표현한 것이다.

소백산과 천왕봉은 각각 소백산 아래에 살았던 퇴계와 지리산 동쪽에 살았던 남명을 상징한다. 소백산에 구름과 비와 바람이 많다는 것은 퇴계의 학문이 성대하여 훌륭한 능력을 가진 여러 유형의 제자들이 많음을 뜻한다. 경상우도 예순 여 고을의 맑고 신령한 기운이 천왕봉과 함께 하늘에 닿았다는 말은 남명의 높은 기상을 천왕봉을 빗대어 나타낸 것으로 진주 출신인 남명에 대한 자부심이 잘 드러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파의 중심지인 진주권과 퇴계학파의 중심지인 안동권은 역사적 전통과 자연환경 및 주민의 기질에 걸쳐 서로 대조적이었다. 안동 지역은 고려조 이래 조선 중기까지 항상 중앙정부 내지 집권세력 편에 서서 상당한 반대급부를 향유하였고, 주민의 기질도 대체로 온건하였다.

이에 견주어 진주권 지역은 무신 집권과 몽고 침략기에 반항을 하거나 저항하기도 하고 민란도 자주 일어나는 등 주민의 기질이 과격하고 현실에 대응하는 자세가 날카로웠다. 남명의 기질과 사상도 이와 같은 역사적 전통과 지역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의 사상과 학문이 제자들에게 전수되면서 경상우도 지역에 하나의 특색 있는 학풍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명 조식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한 이래 간혹 유일(遺逸 : 쓰이지 않고 남아 있는 유능한 인재)로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서 일생을 살았다. 그는 성리학자로서의 처신을 지키면서도 天理(하늘의 이치)와 性命(인성과 천명)을 깊이 파고드는 형이상학적인 학문을 멀리하고 하학인사(下學人事 : 아래로 사람의 일을 공부하는 것) 위주의 학문과 거경행의(居敬行義 ; 마음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올바로 하는 것)의 실천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학문적 입장을 그 나름의 사회적 행동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남명은 일생을 초야에서 보냈지만, 결코 현실을 망각한 은둔자는 아니었다. 그는 수차의 상소에서 당시 사회의 폐해를 지적하여 획기적인 변통를 이루고 잘못된 세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과격한 언사로써 직간(直諫)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단성현감(丹城縣監)의 사직을 요구한 상소 가운데 척족정치(戚族政治)의 폐단을 지적하는 대목에서 직설적이고 과격한 언사가 가장 극명(克明)하게 드러나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유명하다.

이와 같이 과격하고 직설적인 그의 성격이 때로 남명학파를 공격하는 세력들에게는 공격의 좋은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남명이 향촌사회에서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고 임금에게 고하는 것이 불손했던 것은 악을 미워하고 강직한 것이 지나친 것일 뿐, 별달리 유자(儒者)의 기상은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 그가 높은 절개와 강직한 기개는 있지만,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지나치고 학문에는 깊이 천착(穿鑿)하지 못하며, 노장(老莊 : 중국의 노자와 장자)을 숭상하는 것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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