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77년만에 돌아왔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77년만에 돌아왔다
  • 조현웅 기자
  • 승인 2018.12.16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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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제작 불교미술 수작으로 평가
일제 때 마을주민 회유 밀반출 위기 겪기도
해체되어 오랫동안 국립중안박물관에 수장
국보 제 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며 77년만의 귀향을 알렸다. 사진=조현웅 기자
국보 제 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되며 77년만의 귀향을 알렸다. 사진=조현웅 기자

 

산청에 있던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이 77년만에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졌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일제 강점기에 골동품상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20년 넘게 잠들어 있는 등 온갖 수난을 겪었지만 지난 11월 27일 국립진주박물관 점안식 및 복원기념식에서 기나긴 타향살이에 마침표를 찍었다. 11월 30일 국립진주박물관 재개관과 함께 공개된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범학리 삼층석탑 역사적 가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이층 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높이 4.145m 무게 12t 규모다. 석탑 상층기단에는 8구의 갑옷을 입은 신장들이 불법을 수호하고 있는 신장상과 1층 탑신에는 공양을 올리는 4구의 보살상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국내에선 유일하게 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섬장암이란 암석으로 조성됐다. 박물관은 암질을 분석해 화강암과 유사한 섬장암으로 탑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범학리 근처 정곡리에 있는 채석장에서 섬장암을 가져와 하대석을 복원했다. 현재 상층부는 남아있지 않고 하층 기단 덮개돌 아래만 복원된 상태다.

또한 옥개받침이 4단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석탑 양식 중 장상과 보살상의 조합은 독특한 사례로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당시의 뛰어난 조각기술과 경남지역 불교미술의 수준을 보여준다. 더불어 범학리 삼층석탑을 통해 석탑이 있던 사찰이 교종계열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경남지역 사찰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고 있다.

기구한 팔자의 범학리 삼층석탑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일제기 문화재 피해 자료’, 1941년 경상북도 지사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게 보낸 ‘신라시대 석탑(범학리 삼층석탑) 보고문’, 이 석탑을 조사한 조선총독부 기수(技手)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의 복명서(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77년 만에 고향 산청과 인접한 진주로 돌아온 범학리 삼층석탑의 전말을 살펴봤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수백년 전 폐사한 범허사로 추정되는 절터에 서 있다 1910년 무너진 채 처음 발견됐다. 이후 1940년 진주에 거주하던 정정도라는 인물이 땅 소유자와 마을 주민들을 찾아 석탑을 구매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정정도는 포기하지 않고 마을주민들에게 마을회관 건설비로 100엔을 기부하는 조건을 걸며 석탑 반출에 대해 묵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주(절터)도 석탑이 농사를 짓는데 방해물이 될 뿐이었고, 주민들 역시 석탑을 귀찮게 여겨왔던 터라 결국 석탑은 이듬해인 1941년 반출됐다. 정정도가 건넨 마을회관 건설비 100엔은 마을회관 수리비와 제사비용으로 67엔 32전을 사용하고 남은 잔금은 구장(區長)이 보관 중이라고 경북지사 보고서에 나와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이관 추진 노력 마침내 결실

높이 4.145m 무게 12t 규모 고려 야외 전시

산청주민들 원위치 이관 요구 향후 거취 주목

 

반출된 석탑은 무게만 12t에 달해 절터에서 도로변으로 운반하는 데만 500여명이 동원됐다. 이어 석탑 부재들은 진주까지 화물자동차 6대로, 진주에서 대구까지 철도로 운송되어 대구의 오쿠 골동품상에 매각됐다. 경북지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평가액은 약 1만 엔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매매가격은 불분명하다”고 한다. 정정도는 평가액의 100분의 1 가격인 100엔에 석탑을 확보한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수(技手)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범학리 삼층석탑을 본 뒤 “우수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신라시대 석탑”이라고 평가했다.

오쿠 골동품상에게 넘어간 석탑은 대구 제면공장 공터에서 해체된 채 놓여있던 중 1941년 석탑 불법반출소식이 조선총독부에 보고되어 서울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 공병대가 경복궁 안에 다시 세워 1962년 국보로 지정됐지만 1994년 경복궁이 정비되면서 다시 17개 부재로 해체되어 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었다.

이에 국립진주박물관은 진주와 인접한 산청의 대표 문화재 전시를 위해 석탑 이관을 요청했다. 2017년 2월 석탑 이전이 결정됨에 따라 마침내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재건됐다.

이정근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일본인에 의해 불법 반출될 뻔 했지만 일본인에 의해 반출이 막아지는 등 사연이 많은 문화재다. 77년 만에 돌아온 뜻깊은 문화재를 국립진주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많은 시민들이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들을 관람하고 서부경남의 역사·문화를 느껴보시면 좋겠다”고 전했다.

산청문화재 왜 진주로?

국립진주박물관에 따르면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본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계획이었으나 행정적 절차 등을 이유로 전시되지 못하고 수장된 채 보관됐다. 이에 서부경남의 역사·문화를 다루는 국립진주박물관은 석탑을 전시하기 위해 십여년 전부터 꾸준히 중앙박물관에 이관을 요청하여 지난 2017년 2월 석탑이 이전됐다. 이후 약 1년10개월 동안 문화재 조사, 복구, 토지 선정 등이 이뤄졌고, 지금의 자리인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지게 됐다.

이와 관련 일부 산청군민들은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산청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국립진주박물관 및 산청군은 산청 범학리에 삼층석탑을 세우기 위해 정보를 교류하는 등 다각적 검토를 실시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문화재의 본래 위치를 정할 수 없는 점, 12t 규모의 삼층석탑을 지탱할 수 있는 지반을 고려해야 하는 점, 문화재 관리의 문제점 등 현실적으로 어려운 여건이라 지속적인 관리가 가능하며 석탑을 지탱할 수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지게 됐다.

산청군청 문화재 관계자는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산청에 세울 수 있었다면 좋겠지만 여러 문제점들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군은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의 재질인 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섬장암’을 이용해 석탑 복제품을 만들어 산청에 세울 계획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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