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통일신라 전국 9개주 개편 때 행정·군사 중심지로 부상
[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통일신라 전국 9개주 개편 때 행정·군사 중심지로 부상
  • 경남미디어
  • 승인 2019.12.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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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교수의

향토인문학 이야기

<56> 진주역사의 시대별 인문학적 고찰

   4. 진주(晉州)라는 큰 고을(州)로의 성장과정

 

경남 서남부 지역 일대를 한 주로 구획하고 ‘청주(菁州)’라 칭해
행정 관청 소재지인 주치(州治)를 현재 진주지역에 설치
행정과 군사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진주지역이 큰 고을로 발전 
경덕왕 때 강주(康州)로 개칭했다가 고려 건국 뒤 본격적 사용

오늘날 진주가 경남 남서부 지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시초는 삼국이 통일된 이후 였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 전국을 9개 주로 구획할 때 진주지역을 청주로 지정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늘날 진주가 경남 남서부 지역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시초는 삼국이 통일된 이후 였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 전국을 9개 주로 구획할 때 진주지역을 청주로 지정한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사진=진주시)

532년에 김해의 금관가야가,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가 차례로 신라에 의해 무너진 뒤 옛 가야 지역들은 대부분 신라의 영토에 소속되어 갔지만, 진주를 포함한 경남 서남부지역은 상황이 좀 달랐다.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차례로 무너진 뒤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진주와 같이 신라 영토의 주변에 자리하면서, 또 백제와 바로 이웃한 지역은 그 영속 관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과 가야시대까지 분명한 발전을 보이지 못했던 진주지역은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어느 때는 신라의 세력권에, 어느 때는 백제의 세력권에 포함되면서 지역발전이 매우 낙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삼국시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상도 지역 내에서 뚜렷한 지역의 위상을 지니지 못했던 진주지역이 갑자기 눈부시게 성장하게 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진주의 연혁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인 三國史記 <地理志>에는 진주의 옛 이름인 강주(康州)에 대하여 “신문왕 5년(685)에 ‘거타주(居陀州)’를 나누어 ‘청주(菁州)’를 설치했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라는 간략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高麗史 <地理志>에는 “진주목(晉州牧)은 본래 백제 거열성(居列城)을 신라 문무왕 2년에 취하여 주(州)를 두었고, 신문왕 4년에 거타주를 나누어 청주총관(菁州摠管)을 두었으며 경덕왕 때 고쳐 강주(康州)라 하였다”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주는 과거에 백제의 영역에 들었던 거열성에 그 연혁이 연결되는 셈인데, 이 백제의 거열성을 신라가 문무왕 2년에 이르러서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삼한에 대한 기록.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삼한에 대한 기록.(사진=위지동이전)

신라는 거열성을 차지하면서 이곳을 주치(州治 : 州의 행정 관청 소재지)로 하여 거타주(居陀州)라는 주를 설치하였다. 거열성(居列城)을 주치로 하는 거타주는 그 관할 영역이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 그런 거타주가 신문왕 4년에 다시 두 개의 주로 나뉘면서, 그 가운데 한 주를 ‘청주(菁州)’라고 하게 되는데, 진주의 영역은 바로 이때 생겨난 청주(菁州)에서 비롯된다.

한편 ‘三國史記 <地理志>에는 거창현(居昌縣)의 연혁에 대하여 “거창현은 본래 신라의 거열군(居烈郡)(일명 居陀)이었는데,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居昌)으로 고쳤다”라고 하였고, 같은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도 보인다. 이로써 보면 ‘거열(일명 거타)’이라는 지명은 진주와 거창의 연혁에 다 같이 연결되는 셈이다. 이는 원래 신라가 문무왕 2년에 거열성을 차지하여 설치하게 된 거타주가 오늘날의 진주와 거창을 포함하는 꽤 넓은 관할 영역을 포함하였던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 넓은 거타주 관할 영역이 신문왕 4년에 둘로 나눠지면서 그 한 곳은 거타주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다른 한 곳은 청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오늘날 거창의 연혁이 본래 신라의 거열군이라고 하는 것은 둘로 분할되기 이전 거타주의 치소(治所: 행정 관청 소재지)가 오늘날의 거창지역에 있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거타주를 둘로 나누면서 새로 생겨난 청주는 그 치소를 진주에 두었던 것이라 하겠다.

거타주가 둘로 나누어진 1년 뒤인 신문왕 5년에 통일신라는 전국을 행정상 아홉 곳의 주(州)로 크게 구획하여 지방을 통치하는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는데, 이 때 청주를 아홉 주의 하나로 지정했다. 이렇게 통일신라시대 9주의 하나로 청주를 지정하고 그 주치가 오늘날의 진주 지역에 있게 되면서 진주는 이후 큰 고을로 발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문왕 4년 청주의 설치와 이듬해 신문왕 5년 아홉 주의 정비는 진주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고을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획기적인 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신문왕 5년에 정비한 통일신라의 아홉 주는 처음에 일선주, 삽량주, 청주, 한산주, 수약주, 하서주, 사비주, 완산주, 발라주 등 아홉 곳이었다. 이들 아홉 주 가운데 사비주, 발라주, 일선주는 이후 없애고 웅천주, 무진주, 사벌주로 바꾸게 되어서 신문왕 7년에 이르면 아홉주는 사벌주(경북 상주), 삽량주(경남 양산), 청주(경남 진주), 한산주(경기 하남), 수약주(강원 춘천), 하서주(강원 강릉), 웅천주(충남 공주), 완산주(전북 전주), 무진주(전남 광주)로 새롭게 간추려 굳혀졌다. 그리고 아홉 주를 비롯한 신라의 전국 고을 이름은 경덕왕 16년(757)에 당나라를 본떠 크게 한번 바뀌었다. 이때 청주는 강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그 뒤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이전의 청주라는 이름으로 돌아와 상당 기간 쓰이다가 고려 건국 뒤에 다시 강주로 바꾸었다.

이처럼 진주는 통일을 달성한 신라 왕조가 새로운 지방 지배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아홉호 주의 한 주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아홉 주를 개편하고 변동하는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그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통일신라를 통해 지방 행정의 중심지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아홉 주는 오늘날의 도에 해당되는 정도의 넓은 행정상의 영역을 뜻하는 동시에 이 넓은 영역을 관할하는 주청사가 위치한 고을을 뜻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광역주라는 의미에서 주에는 관할 영역 내부에 주의 치소가 있었던 한 곳의 주를 비롯해서 여러 개의 군(郡)과 소경(小京)같은 중간 단위의 행정구역이 있었으며, 이들 주, 군, 소경은 다시 몇 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이렇게 아홉 주를 중심으로 전국의 지방을 행정적으로 조직하고 편성하여 다스린 왕조가 통일 이후 신라 왕조의 지방 통치 벙식이었다. 그 결과 통일신라에 이르면 고을과 고을 사이에는 행정조직에서 위계질서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강주의 관할 영역에는 한 곳의 주, 열한 곳의 군, 서른 곳의 현, 모두 마흔두 곳의 고을이 속해 있었다. 강주는 이들 마흔두 곳의 고을을 관할하는 지방 행정상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통일신라 시대 강주 관내의 주군과 관할 현을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강주(康州)에 대한 기록.(사진=지리지)
삼국사기 ‘지리지’의 강주(康州)에 대한 기록.(사진=지리지)

강주(康州)--가수현(嘉壽縣), 굴촌현(屈村縣).

남해군(南海郡)--난포현(蘭浦縣), 평산현(平山縣).

하동군(河東君)--성량현(省良縣), 악양현(岳陽縣). 하읍현(河邑縣).

고성군(固城君)--문화량현(蚊火良縣), 사수현(泗水縣), 상선현(尙善縣).

함안군(咸安郡)--현무현(玄武縣), 의령현(宜寧縣).

거제군(巨濟郡)--아주현(鵝洲縣), 명진현(溟珍縣). 남수현(南垂縣).

궐성군(闕城郡)--단읍현(丹邑縣), 산음현(山陰縣).

천령군(天嶺郡)--운봉현(雲峯縣), 이안현(利安縣).

거창군(居昌郡)--여선현(餘善縣), 함음현(咸陰縣).

고령군(高靈郡)--야로현(冶爐縣), 신복현(新復縣).

강양군(江陽郡)--삼가현(三嘉縣), 팔계현(八谿縣), 의상현(宜桑縣).

성산군(星山郡)--수동현(壽同縣), 계자현(谿子縣), 신안현(新安縣), 도산현(都山縣).

상기처럼 강주는 가수현과 굴촌현을 직속현으로 두면서 남해군을 비롯한 열한 개 군을 관할하는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일대까지 걸친 마흔두개 고을의 행정 중심지였다. 주에는 총관 또는 도독(都督)이라 불리는 최고의 지방장관이 부임하였고, 주성(州城)이 축조되었으며, 주사(州司)로 불리는 주의 청사에는 지방관인 도독을 비롯해서 주조(州助), 장사(長史)라는 관리를 각기 한 사람씩 두었고, 감찰관으로 외사정(外司正) 두 사람을 배속하였다. 그리고 ‘비금당’, ‘만보당’, ‘사자금당’ 같은 군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군부대의 군관과 병졸은 관아 주변과 주위의 산성에 주둔하면서 주사와 주성을 방위하고 도적을 잡거나 반란을 진압하는 따위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신라시대의 주는 원래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그 장관을 군주(軍主)라고 일컬었으나, 태종 무열왕 때 이를 중국식으로 고쳐서 도독이라 불렀고, 신문왕 때에는 총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주 장관의 명칭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지방장관의 역할과 임무가 군사적 성격으로부터 점차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감에 나타나는 변화이기도 했다. 총관은 급찬(9관등) 이상 이찬(2관등)까지의 관등을 가진 사람을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육두품(신라 왕족인 성골과 진골 다음으로 귀족 신분인 두품에서 가장 높은 신분. 두품은 일두품에서 육두품까지 있었음) 출신도 규정상으로는 임명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진골이 독점하는 직위였다.

아홉 주와 같은 지방의 정치, 행정 중심 고을에는 가까이 큰 규모의 지방 군단이 배치되기도 했다. 강주의 경우 현무현(지금의 함안)에 ‘소삼정’이라는 군대가 배치된 경우가 그러하다. 이 밖에 강주에는 ‘만보당’이라는 보병부대가 두 개 배치되었고, 또한 ‘청주서’라고 하는 기병부대가 배치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기병 부대는 아홉 주 가운데 일부 주에만 배치된 것이기도 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행정, 군사 중심지는 인근 고을과 비교해서 그 발전의 정도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서울(경주)에 사는 귀족이 총관으로 바꾸어가며 부임하고 그에 딸린 관속과 가족이 거주하게 되면서 왕경문화의 일부가 지방사회에 이식되는 따위 아홉 주의 치소는 지방문화의 발전에서 중요한 거점지 역할을 맡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통일신라에 이르러 강주는 이름으로나 실제로나 경상도 지역에서 행정, 군사,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놀라울 만큼 발전을 거듭할 수 있게 되었다.

강신웅

본지 주필

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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