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들은 철 따라 색깔이나 모양이 약간씩은 변하기는 하지만 천재지변이 발생하거나 사람들이 일부러 손대지 않는 이상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다. 사람이나 동물처럼 주변의 관계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덕스럽지가 않고, 늘 한결같이 묵묵하게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과 소임을 다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존재로 여겨지고 있고 실제로 나무가 사람들에게 베푸는 혜택도 많다. 봄에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연녹색의 새순을 보여 주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게 하고, 여름은 무성한 짙은 녹색의 향연으로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과 싱그러움을 제공해 주고,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들로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켜서, 고속도로 휴게소 절반을 관광버스가 차지하도록 만드는 재주도 부린다.
특히, 겨울에는 영하 수십도의 온도에서도 매서운 한파와 눈보라를 묵묵히 맞으면서 수빙(樹氷) 또는 상고대라고 불리는 얼음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인내가 무엇인지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겨울 혹한에서 나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애처로움이나 수고로움에 대한 인식은 없이, 그저 나무에 매달린 상고대 모습만을 보고 감탄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지만, 나무는 사람들의 그런 행동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인내한다. 매년 겨울마다 나무들이 겪는 이러한 혹독한 고통을 겪는 존재들이 또 어디 있을 지 싶다.
충남 서산시 해미 읍성에 가면 슬픈 역사와 함께 인고의 세월을 겪은 상처를 지닌 수령 300년이 추정 되는 회화나무가 있고, 강릉 오죽헌에 가면 율곡선생님 생전에 심겨진 것으로 알려진 수령 600년이 된 배롱나무가 있다. 각각 300번과 600번의 그 혹독한 한겨울을 견뎌낸 나무들을 보면, 나는 그들에게 존경심을 느끼기도 한다. 나무의 수령에 각자의 나무가 가진 희로애락의 역사와 이야기 거리가 더해지면 나무를 대하는 시선은 저절로 겸손해지게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키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 라고 말한 스피노자처럼 뭔가 심오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늘 한결 같은 나무가 좋아서 나무를 키우는 것이다.
나무는 나무를 키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대단히 순종적이고 고마운 존재다. 반려견이나 가축 동물들처럼 밥과 물을 매끼니 때마다 주지 않아도 되고, 줘야 할 타이밍을 잠깐 놓쳐도 낑낑거리거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이 계속되면 조용히 혼자서 죽어 버리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독한 면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의사표현이 가능한 반려견이나 가축들을 키우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세심해야 하고, 특히 관찰력이 좋아야 한다. 나무가 죽기 전에 수동적으로 다소곳이 표현하는 미세한 변화의 몸짓을 읽을 수가 있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나무와 소통이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키우고 있는 나무들을 마주 보고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해 본다.